
국내에서 초연하는 우란문화재단 기획연극 '보호받지 못한 사람들'(원제 'Orphans')은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영국의 한 가정에서 하룻밤 사이에 벌어지는 사건을 그린다. 최근 넷플릭스 화제작이었던 '소년의 시간'이 한 남학생의 여성혐오 범죄를 다뤘다면, 이 작품은 브렉시트로 터져 나오기도 한 영국 사회의 배타성과 개인의 도덕적 딜레마를 파고든다. 영국 작가 데니스 켈리가 쓰고, 연극 '붉은 낙엽' '바닷마을 다이어리' '지킬 앤 하이드' 등을 무대에 올린 유명 연출가 이준우가 연출을 맡았다.
등장인물은 세 명이 전부. 피범벅이 된 리암은 부부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한다. 그런데 어째 말이 길어질수록 앞뒤가 맞지 않는다. 리암은 피 흘리는 남자를 돕느라 옷에 피가 묻었다고 주장하지만, 휴대폰이 꺼져 경찰에 신고할 수 없었다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의 휴대폰 벨소리가 스산하게 울려 퍼진다.
모두가 당황하던 그때, 대니는 경찰에 전화를 걸어 피 흘리는 남자를 돕자고 제안한다. 그를 가로막는 건 헬렌이다. 그녀는 동생 리암에게 전과가 있기 때문에 신고하는 순간 경찰이 불필요한 오해를 할 수 있다며 반대한다. '가족'이 최우선인 헬렌과 '양심'을 따르려는 대니는 팽팽히 맞선다. 급기야 헬렌은 "(임신 중인) 아이를 지우겠다"며 자신과 리암 편에 설 것을 대니에게 강요한다.
연극은 다양한 형태의 '폭력'을 조명한다. 결국 가해자로 드러난 리암은 물리적 폭력을 나타낸다. 피해자가 다른 인종(아랍인)이라는 설정은 현대사회에 만연한 외국인 혐오 범죄를 고발하는 장치다. 헬렌은 언어적 폭력의 잔혹성을 상징한다. 그녀가 리암과 대니에게 가하는 언어적 폭력은 물리적 폭력만큼이나 파괴적이다. 언어적 폭력에 시달리는 대니도 폭력에서 자유롭지 않다. 누구보다 도덕적이고 양심적으로 그려지는 대니에게서도 숨겨진 폭력성이 새어 나온다.

결과적으로 세 사람 중 누구도 비극을 막지 못했다. 헬렌은 리암을 보호하려 애썼지만 처참한 결말을 맞는다. 리암과 대니 역시 파국을 피하지 못한다. 어쩌면 이들 가정을 지키는 책임은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에게 있었는지 모르겠다. 매 순간 혐오의 감정에 빠질 수 있는 나를 경계하고, 폭력의 단어를 휘두를 수 있는 자신을 단속해야 하며, 내면의 괴물을 다스려야 한다는 사실을 이 작품은 말하고 있다. '보호받는 것'에 기대지 말고 스스로를 '보호하는 것'이 결국 모두를 구원하는 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연극 '보호받지 못한 사람들'은 2009년 영국 초연 이후, 전 세계 10개국 이상에서 공연했다. 2009년 에든버러 프린지 페스티벌 무대에 올라 에든버러 프린지 퍼스트상, 헤럴드 엔젤 어워드 등을 수상했다.
이번 공연에서 헬렌 역은 정새별, 대니 역은 이강욱, 리암 역은 류세일이 맡았다. 별다른 무대 전환 없이도 눈을 뗄 수 없게 긴장감을 극대화하는 배우들의 내공이 돋보인다. 공연은 오는 30일까지 서울 성수동 우란문화재단 우란2경에서 열린다.
허세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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