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렇게 재미있는 오페라는 처음이다."
지난 26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개막한 국립오페라단(단장 겸 예술감독 최상호)의 정기공연 <세 개의 오렌지에 대한 사랑>(L’Amour des trois Oranges) 초연 현장은 관객의 웃음과 흥분으로 가득 찼다. 전막이 끝나고, 25분간의 인터미션 동안 로비는 후기와 기대를 나누는 관객들로 떠들썩했고, 객석에선 "후반부는 어떻게 될까" 하는 설렘의 기류가 흘렀다.
이 작품은 러시아 작곡가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가 이탈리아 희곡을 바탕으로 프랑스어 대본을 써 1921년 미국 시카고에서 초연한 작품으로, 이번 공연이 국내 전막 초연이다.
웃음을 잃은 시대에 건네는 상상 속 처방전 같은 이 작품은 장면마다 주요 아리아가 등장하고, 합창단이 무대 위에서 노래하는 전통 오페라의 전개 양식을 유쾌하게 비튼다. 프롤로그에서 비극파, 희극파, 서정파, 광대들이 무대 위에서 장르 논쟁을 벌이다, "지금부터 세 개의 오렌지에 대한 사랑이 시작된다"는 선언으로 본편이 열린다. 드라마 속 드라마의 구조 속에서 연극성과 초현실주의, 풍자와 슬랩스틱이 혼재된 전개는, 오페라의 고정 관념을 무너뜨리며, 웃음을 잃은 현대 사회에 대한 조롱과 위로를 동시에 전한다.

이 오페라의 줄거리는 기괴하고 독창적이다. 작품의 서사는 '웃음을 잃은 왕자'라는 설정에서 시작된다.우울증에 걸린 왕자를 웃게 하기 위해 궁정 인사들이 분투하고, 자신이 비웃은 마녀의 저주로 왕자가 세 개의 오렌지를 사랑하게 되며 여정이 시작된다. 오렌지에서 튀어나오는 세 명의 공주, 마녀와 마법사의 대결, 희극적 음모와 계략이 빠른 템포로 이어진다.
무대 전환조차 예술이 된 연출
로렌초 피오로니의 연출은 시각적 밀도로 관객의 몰입을 견인한다. 무대는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간에서 시작해, 공연이 진행될수록 인물과 소품, 장치가 축적돼 마지막엔 무대가 가득 찬다. 1막과 2막 사이에는 왕이 무심히 바나나를 먹는 영상을 투사하며 무대 전환을 처리했다. 이 장면에서 충신 판탈론이 무대를 가로지르며 "학~씨!"를 외치는 순간, 객석은 웃음바다가 됐다. 무대 전환에 실제 스태프들이 등장해 세트를 이동시키는 장면 역시 객석과 무대의 벽을 허물며 환상의 공간을 낯설게 만든다.
특히, 사실적인 영상의 활용이 관객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예술의전당 마당에서 출발한 자동차가 서울 시내를 내달리는 영상은 극 중 공간 이동을 초현실적으로 처리한 장치로, 무대디자이너 파울 졸러의 동시대성을 중시하는 상상력의 표현이었다.
사랑이 아니라 '오렌지에 대한 집착’
연출자 로렌초 피오로니는 “이 오페라는 웃음을 찾아가는 역설적 여정”이라고 설명하며, 인간 내면의 본능, 무의식, 비논리를 탐색하게 한다고 밝혔다. 원작과 달리 4막 피날레에서 마법사 첼리오가 되살린 공주 니네트가 사람이 아닌 파손된 마네킹으로 등장하고, 왕자가 이를 안고 기뻐하는 장면은 관습적 해피엔딩을 과감히 거부한 장면이다. 연출자는 이 장면을 통해 인간을 향한 사랑이 아닌 물질에 집착하는 현대인의 허영심을 비판했다. 제목은 <세 개의 오렌지에 대한 사랑>이지만, 실제 무대에서 구현된 결말은 '세 번째 오렌지에 대한 집착'에 더 가까웠다.

작품 전반에는 계급과 위계, 그리고 그 뒤에 숨은 상대적 박탈이 정교하게 내재되어 있다. 왕자와 트루팔디노가 오렌지를 찾아 거인 크레용트의 성에 들어갔을 때, 그들은 그저, 주방에서 허둥대는 생쥐처럼 보인다. 거인 요리사의 두 손이 곧 절대 권력자로 등장하는 장면은, 계급위에 또 다른 신분이 존재하는 현대의 계급 역학을 표현한 뼈있는 풍자다.
이 작품에서 가장 인상 깊은 것은 국립오페라 노이오페라코러스 단원들의 역할과 움직임이다. 8명의 리디큘러스들은 오페라 전반에서 주역 성악가보다 더 많은 출연 분량을 소화하며, 합창단, 스태프, 연기자까지 3가지 역할을 해냈다. 작품 전막에 걸쳐 등장하는 '비극파' '희극파' '서정파' 무리들은 마치 현대 사회의 군중을 은유한다. 그 안에는 '이 길이 맞다'고 외치는 길잡이형, 리더형 캐릭터도 있지만, 방향은 반대라고 하면서도 결국 무리와 함께 움직이는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는 존재도 있다.


국내 성악가들의 강렬한 존재감도 부침이 없었다. 판탈론 역의 바리톤 정제학, 첼리오 역의 베이스 최공석은 연기와 음악 모두에서 중심축 역할을 해냈고, 파타 모르가나 역의 소프라노 박세영은 무대 위 가창보다, 영상 등장 장면에서 더욱 기괴한 존재감을 발산했다. 왕 역의 베이스 최웅조는 유머러스한 의상과 분장을 하고도 위엄 있는 저음으로 극의 무게를 잡았다. 이날, 가장 기억에 남는 성악가는 왕자 역 테너 김영우다. 독일 쾰른 오페라하우스 소속 가수인 그는 강한 에너지와 압도적인 성량으로 한국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헬덴 테너급 역량을 보여줬다.
이번 무대는 오페라가 본질적으로 지닌 다국적, 다장르적 정체성을 보여준 작품이다. 러시아 작곡가의 프랑스어 오페라를, 독일 지휘자 펠릭스 크리거와 스위스에서 온 연출가 로렌초 피오로니, 오스트리아 무대디자이너 파울 졸러, 한국 성악가들이 함께 만든 국제적 협업 무대였다.

<세 개의 오렌지에 대한 사랑>은 고전 오페라의 관습에서 벗어나 낯설지만, 흥미로운 시간이었다. 오페라의 다른 얼굴을 보고 싶었던 이들에게는 더없이 매력적인 작품이다.
로비에서 만난 파리국립고등음악원 교수, 호르니스트 자크 들르플랑크(62)는 한국에서 경험한 프랑스어 오페라에 대해 "무대 연출도 좋고, 색감도 좋고, 의상도 좋고, 모든 게 다 훌륭했다"며 찬사를 보냈다.
국립오페라단이 국내 전막 초연하는 프로코피예프 오페라 <세 개의 오렌지에 대한 사랑>은 오는 29일까지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계속된다.
조동균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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